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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외과 여대생이 바라본 화해치유재단 해산

18-12-14 15:55

본문

화해치유재단 해산에 대한 소회

 

할머니는 18살이 되자마자 선을 보고 급히 결혼을 서둘렀다. 일본군이 조선 처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다는 흉흉한 소식이 마을에 이미 알려진 터였다. 할머니가 아는 이웃 마을 처녀 중에서도 돈 벌러 가는 줄로만 알고 일제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이 있었다고 했다.  


생전에 할머니께서 가끔 들려주시던 얘기이다.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몇 해 전, 할머니의 고향인 강경을 방문했을 때에는 더 싸하게 아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강경근대역사전시관에서 일본군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조선 처녀들을 성노예로 이용하고 학살했는지 적나라하게 사진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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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고향인 강경근대역사전시관에서 목도한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극적인 삶은 결코 그들 개인의 일생이 아니었다. 바로 내 할머니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눠야 마땅한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달,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재단에 남아있는 기금 57억 원은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등과 논의해 처리할 방침이라고 한다. 피해자들과 국민 여론의 비판 속에도 출범했던 재단은 28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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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피해자의 목소리와 여론은 무시한 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종식시키는 조건으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체결된 이후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28개월 만에 해산됐다.

 

화해치유재단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정치외교가 전공인 터라 동기들과 본 재단의 관련 분야 학위자 채용 모집 공고를 본 적이 있었다. 동기들 말로는 다른 데보다 월급도 더 많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일지언정 전공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비극적이고도 가슴 아픈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할머니의 고향에서, 그리고 여행 중에도 역사의 편린들은 불쑥불쑥 나타나 가슴을 후벼 파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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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서울시청 시민청을 우연히 들렀다가 전시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 이야기’를 만났다. 전시는 1993년으로 시간을 거슬러가 할머니들이 자신의 삶과 감정을 드러내고 치유받기 시작한 미술 수업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듣고 감히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할머니들께 5년간 미술치료 수업을 했던 이경신 화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누구좀 더 가까이에서 목도하고 함께 나눈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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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순덕 할머니의 유작 ‘끌려감’.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할머니들은 용기를 내어 문제를 알리고 얘기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후에도 일본의 거짓 뉴스와 계속 싸워나가며 2차 피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히 상처받고 힘들어하셨다.” 이경신 화가는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할머니들이 자신의 감정과 상처를 그림에 담아내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분이 용기를 내자 다른 할머니들도 따라 나섰다. 어느덧 할머니들은 자신조차 아파서 외면하던 상처를 되돌아보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과 일본 전시를 떠났던 때였다고 한다. 일본 우익 세력들은 그림을 찢어버리겠다며 협박했고 이 작가는 할머니들이 무서워 떠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했다. 김순덕 할머니는 “혹여나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쳐들어와서 후손들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끼칠까봐 솔직하게 그림 그리는 게 무서워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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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찾은 이용수 할머니와 할머니들께 5년간 미술치료 수업을 했던 이경신 화가.

 

다행히 전시회는 무사히 진행됐고 전시회를 찾은 일본 시민 일부는 눈물짓고 미안해하거나 할머니들께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세월은 흘렀고 미술 수업을 받았던 할머니들 중 이용수 할머니는 전시회를 찾아 이제 언니들 모두 가고 나 혼자 남았네라는 말을 되뇌었다.  


2015년 피해자의 목소리와 여론은 무시한 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종식시키는 조건으로 ·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체결됐을 때 느꼈던 국민적인 좌절감은 너무나 크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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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쫓아오는 집채만 한 군화의 악몽에 평생 시달린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

 

그러나 이제라도 역사의 흐름은 바른 길로 방향을 틀어 나가기 시작했다. 화해치유재단 해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계속 되고 있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관심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할머니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힘을 보태야 한다.  


다수의 관심과 노력은 분명 많은 것을 바꾼다. 지난 20여 년간, 인권의 관점에서 할머니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외교협상의 파기를 이끌어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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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 올라와 있는 할머니들의 기록.

 

125, 김순옥 할머니께서 97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현재 생존해 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26분이다. 이분들은 우리 모두의 할머니이자 어머니이다. 친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듣고나서부터 이런 당연한 명제는 더욱 강렬히 마음에 새겨졌다. 우리 할머니들을 결단코 이렇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어김없이 진행되는 수요집회에는 항상 많은 청소년들이 자리를 채운다. 자리한 많은 청소년들과 피해자 할머니들께 부끄럽게도 수요집회가 1300여 회를 지나오는 동안, 자리를 지킨 경험은 한 손에 꼽힌다.  


다수의 관심에서 시작된 힘은 항상 많은 것을 바꿔왔다. 청소년들의 관심과 열정을 보며 그런 확신은 더욱 커졌다. 할머니들을 비탄에 빠뜨렸던 화해치유재단은 해산됐다. 이제라도 할머니들을 진정으로 위한 시작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할 때이다.

 

<자료출처=대한민국 정책기자단>

 
 
 
 
 
 
백기호 선임기자

<저작권자 ⓒ 자치법률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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